귀로

유르스나르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거창하게 구른 참이었다. 달도 없는 그믐밤이라고 해도 그는 어렵잖게 사물을 분간할 수 있지만, 지나치게 서두르다 보니 발밑을 제대로 살피지 못 했다. 한쪽 발이 이상하게 허전했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다 그쪽 신발이 어디론가 날아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처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그걸 찾을 시간조차 아까웠다. ...

이것으로 작심삼월 프로젝트도 마지막이군요. 사실 저는 제가 이걸 실패할 거란 걱정은 별로 안 해봤습니다(할 수 있을 만한 주기를 고르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 이야기가 먼저 끝나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을 좀 했는데요. ...웬걸. 1부도 아직 안 끝났는데 프로젝트가 끝나고 말았습니다.ㅋㅋㅋ 향후 어떤 식으로 연재를 이어갈 것인지는 고민 중이랍니다. 뭐 보시는...

바람을 쐬겠다고는 했으나 귀왕은 사립문 밖으로도 나가지 않은 채 울타리 근처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백하는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가만히 기다렸다. 귀왕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가 입 속으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다 갑자기 뒤로 돌아섰다. 하마터면 백하와 부딪칠 뻔했다. 백하는 순간 당황하며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귀왕도 멈칫하더니 한동안 말없이 그를...

“무슨 생각해?” 유르스나르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본궁 앞 마당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를 현재로 돌려놓은 장본인인 수이가 무심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유르스나르는 조금 전까지 하던 생각의 끄트머리를 잠시 붙들었다. 그때는 도통 몰랐던 것들을 지금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요컨대 귀왕은 그를 귀령에서 내보내 주고 싶어 했다. 아마도 ...

귀령에 머물기 시작한 이래로 유르스나르는 한 번도 서쪽 별궁에서 나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날 불도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잘 모른다. 어쨌든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일은 터졌고, 유르스나르는 평소처럼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다가 먼발치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불을 꺼야 한다고 말하는 소리와 분주히 오가는 발소리가 어...

두 사람은 성 쪽으로 향했다. 제가가 자기 집에 없었으니 그쪽에 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쪽도 어수선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니, 사람이 많아 더한 것도 같았다. 성문 앞에 선 병사들은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가 나타나면 즉각 뛰쳐나갈 것처럼 바짝 긴장해 있었고, 사람들은 불안한 듯 주위를 흘깃거리며 돌아다녔다. 성 안에 들어갈 일이 없으면 좋을 텐데. 귀...

귀왕은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사위는 고요했다. 건조하고 서느런 공기가 코끝에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물씬 풍기던 흙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는 커다란 방 한복판에 서 있었다. 어딘지 낯이 익었다. 온갖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인 것만 뺀다면. 물건의 주인도 나름대로 가지런히 정리해 둔 것 같지만 이렇게 많아서는 그런 티도 잘 안 난다. 귀왕은 제 발치를 내려...

유르스나르는 한 팔로 귀왕을 들고(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른 손에는 등롱을 든 채 밤 산길을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가 온천에서 곧장 산기슭으로 뛰어내리려고 하지 않은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그 팔에 들린 채 덜걱덜걱 흔들리는 건 썩 다행스럽지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가느다란 송곳처럼 고스란히 얼어붙은 것이 보였다. 귀왕은 마뜩찮은 마...

유르스나르가 돌아온 것은 해질녘이 다 되어서였다. 어딜 가서 뭘 했는지 온갖 물건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제가는 으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를 맞이했다. 유르스나르는 제가가 가리키는 대로 물건을 부려 놓으며 무엇을 어디서 누구에게 받았는지를 한참 늘어놓았다. 사람 이름과 직위가 끝도 없이 튀어나와서 귀왕은 중간쯤부터 집중력을 잃고 말았다. 제가는 듣는...

병사 두 명이 성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유르스나르는 혹시나 싶어 그들을 살폈지만 아무래도 영 모를 얼굴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계절을 헤아렸다. 그때는 봄이었다.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여름, 가을. 이제 겨울이 거의 다 왔으니 2년 가까운 시간이었다. 모르는 얼굴이 생겨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일단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안에 ...

그날은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얼음 조각 같은 싸락눈이었다. 유르스나르는 귀왕에게 두꺼운 겉옷을 한 벌 더 입으라고 권했다. 그 자신도 홑겹이나마 옷을 두 겹 더 입고는 고이 모셔만 두던 신발을 드디어 꺼내서 발을 꿰었다. 귀왕은 옷의 목깃을 조금 더 세웠다. 뭐라 해도 그 역시 이렇게 북쪽으로 온 것은 처음이었고, 날은 정말로 추웠다. 그들은 쌓인다기보다...

다음날 새벽 유르스나르는 조용히 짐을 꾸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 할 만큼 희미하게나마 눈가가 살풋 붉었다. 귀왕은 그가 밤새 한 잠도 못 이뤘을 거라는 데 천금이라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아무도 내기를 할 사람 따윈 없기에 실제로 그럴 일은 없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유르스나르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어색하...